유월 내내 선풍기로 버티다가 에어컨을 켰다. 이번 여름은 유독 뜨겁고 습해서 ‘한여름이 되기 전까지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는 원칙을 하마터면 지키지 못 할 뻔했다. 무섭게 내리쬐는 햇빛이 옥상을, 그리고 바로 아래에 있는 우리 집을 차례로 달구면서 한낮엔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장판은 끈적이고 몸은 익어갔다. 무겁고 눅눅한 공기에 숨만 쉬어도 진이 빠졌다.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방 안을 채우고 나서야 ‘세상에, 이제 에어컨 없이 어떻게 살지?’하고 새삼 실감했다.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서인지 여느 때보다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눈을 뜨면 ‘아, 일하기 싫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침대에 오래 파묻혀 있고 싶은 충동이 매일 아침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며칠을 쉬는 게 나을 텐데 생산성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여겨 온 습성 때문에 잔뜩 울상을 하고도 모니터 앞에 앉아서 괴로워했다. 그런 미련한 짓을 할 때면 노동과 꿈은 섞이게 두지 말았어야 했다는 시답지 않은 후회가 일었다.
        몇 달 전에 맡았던 프로젝트가 끝난 후로 줄곧 이 상태다. 일에 관한 이야기는 미담보단 괴담이 될 확률이 높으니 되도록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가끔은 아무렇게나 푸념을 늘어놓고 싶어진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담당자는 정중했고 그의 메일엔 기대에 찬 밝은 말들이 가득했다. 멋진 작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설렘에 큰 고민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모호하고 난해한 설명으로 인해 초반부터 작업 시안을 몇 번 뒤엎어야 했다. 약속은 대체로 지켜지지 않았고 연락마저 제때 닿지 않았다. 급기야 인쇄 당일 아침에 디자인해야 할 자료가 넘어오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최악은 내게 말도 없이 최종 결과물을 수정했다는 점이었다. 일을 하면서 세 번 울었다. 두 번은 디자이너로서 존중을 받지 못한다는 서러움에, 마지막은 어쨌든 끝나긴 했다는 안도에서였다.
       그 뒤로 몇 가지의 프로젝트가 연달아 꼬이면서 속을 썩였다. 지치다 못해 모든 게 끝없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의도와 상관없이 의뢰인이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는 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수정 요청에 시달리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모순이 뒤섞인 결과물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설득인지 설전인지 모를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날도 다반사였다. 그들의 기분을 살피며 고심해 단어를 고르고, 앞뒤로 세심하게 안부를 묻는 문장을 덧붙여 가며 길고 긴 답장을 썼다. 그들의 ‘싫어요’에는 이유가 없어도 내 ‘안 돼요’에는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종종 작업을 하는 것보다 메일을 쓰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게 이 일은 계약서에 나열된 몇십 가지의 조항을 지키는 일이라기보다 마음을 읽어내는 일에 가까워서, 마음의 일이라는 건 변덕스럽고 순리적이지 않아서 매번 어려웠다. 잘 해내면 기쁘지만 잘 안되면 그만큼 고역인 게 없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을 다루는 데는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글거리는 날씨와 착실하게 누적되어 온 피로 탓에 사소한 문제에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한동안 입을 잔뜩 내밀고 미간엔 주름을 잡은 채 이불을 팡팡 털거나 물건을 쾅쾅 내려놓거나 바닥을 뚫어버릴 기세로 박박 닦곤 했다. 상냥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이 일은 마치 내가 괴팍해질 때까지 시험해 보는 것 같다.



작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 실패감이 곧바로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게 정말 내가 느끼는 기분이다. 세상과 이어져 있던 끈이 툭하고 끊어지면서 모든 것이 칙칙하고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작업에서 오는 우울함이나 무기력이 삶 전체를 잠식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럴수록 시선을 돌려 일상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도. 다만 진단보다는 언제나 실천이 어려운 법이고 이미 정체성의 많은 부분이 일과 섞여 있어서 그 둘을 분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애쓸수록 그 강박에 더 피로해지기만 했다. 
       지나칠 바에 모자란 게 낫다며 일부러 거리를 둬 보기도 했다. 나는 그저 받는 돈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런데 너무 바보 같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으면서, 그걸 찾는 데 그 많은 날을 썼으면서 마음을 참는다는 게. 그리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단순히 돈을 버는 일로써 받아들이기엔 쓰는 시간과 받는 고통에 걸맞은 돈을 벌지도 못 했다. 애초에 창작에서 욕망을 배제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모든 일을 똑같은 태도로 대하는 것. 담담하고 잔잔하게, 방어가 아닌 수용으로써. 이제 와 굳이 고백이랄 것도 없지만 나는 기분의 문제를 통달할 만큼 훌륭한 사람도, 그럴 그릇도 못 되므로 이 시도 역시 얼마 가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볼 때면 어떻게 그렇게 우직하게 할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지치지 않았냐고, 다 놓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냐고. 그들의 이유와 나의 이유는 같지 않을 테고 이제는 그들의 답을 들을 수도 없지만, 나는 이 일이 마치 평생을 한 것처럼 지긋지긋해질 때가 있다고, 최선을 거절당할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고, 상대의 무례함을 삼켜야 할 때면 숨이 콱 막혀오는 것 같다고. 얼굴도 모르는 그들 앞에서 실컷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언젠가부터는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다른 세계의 나를 상상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기회나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에 온 신경을 쓰느라 혼자가 되지 않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옆에 있는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지도 않는 따뜻하고 친밀한 삶에 대해서. 의뢰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는 그렇게 혈안이 되어 있었으면서 조건 없이 있어 준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다는 게 우습게만 느껴졌다. 일을 핑계로 현실에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만날 수 없는 그곳의 다정한 나를 상상하면 꽤 마음에 들었다.



요상한 일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제명에 못 죽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건. 뇌에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부위가 거의 같다던데 혹시 나는 그 둘을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일종의 자해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이 행위가 삶을 증명할 방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일까. 
        스스로 묻고 답하다 보면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이 남았다. 그러니까 원래 지는 게임이었다. 빌어먹을 애정. 이 애정이 나를 병들게 할 때마다 심술이 났다. 나는 이렇게나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을 주지 않니, 왜 한 번도 내게 상냥하질 않니 하면서 서운해졌다. 정말이지 그릇이 작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좋았다. 그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변하지 않고 좋아한 유일한 일이었다. 흘러가는 생각과 시간을 붙잡아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다는 건 아마도 내가 쥘 수 있는 가장 반짝이는 패였을 것이다. 그걸 나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졌다. 
       물론 생각을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은 늘 어렵고 노력과 별개로 내 손끝에서 나온 결과물이 형편없어 위축될 때도 많다. 하지만 내게 오래 머무르는 건 그것과는 다른 순간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안개 속에서 단숨에 시야가 선명해지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작업이 알려주고 있다고 깨닫게 되는 아주 찰나의 순간. 그때마다 내 안에서 번지는 엷은 온기에, 고요한 울림에 나는 어김없이 마음을 빼앗겼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같은 온도와 진동으로 재연돼서, 어떤 부침도 무화시킬 만큼 커다랗고 힘이 세서. 고작 몇 발짝을 달아났다가도 순순히 백지 앞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니까, 나는 못해도 이런 시기를 여든세 번쯤 겪었을 텐데 여전히 디자이너로 살고 있다. 의지도 열정도 시들시들해져서 ‘이제 제2의 인생을 열어보자!’ 결심할 때마다 그 기억이 불쑥 나타나 발목을 잡는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속삭인다. 품고 있는 것들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유혹한다. 설령 그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대단한 창작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그 희미하고 작은 환희의 순간들을 붙들고 조금 더 해보는 수밖에.
        일을 연애처럼 해서인지 일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더 넓어지라고, 사랑이란 건 원래 수고로운 거라고, 합리적이지도 균형적이지도 않다고. 그러니 내게 필요한 건 마음을 나눌 정확한 셈법이나 노련한 기술이 아니라 무턱대고 쏟아지고 제멋대로 지쳐버리길 반복하는 소란을 끌어안는 유연함이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게 속절없이 기울어버린 마음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가장 가까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보내야 할 파일을 예상보다 한 시간 이르게 마무리하고 메일을 보냈다. 수락일지 거절일지, 어떤 답장이 올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미 전송 버튼을 눌렀으니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과감하게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갔다. 
       해가 졌는데도 열기가 곳곳에 남아 있어서 티셔츠에 금세 땀이 배었다. 발걸음을 서둘러 가까운 마트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입구에서부터  ‘오늘의 특가’ ‘맛없으면 100% 환불’이라는 큼지막한 문구가 적힌 전단이 눈길을 끌었다. 그 아래 매대에는 빨갛고 단단하게 익은 체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가서 옆에 있는 비닐봉지 한 장을 뜯어 체리를 가득 담아 왔다.
       맞다. 이즈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잔뜩 나오는 시기다. 체리, 자두, 복숭아, 블루베리, 수박. 떠올리기만 해도 탐스러운 것들이 질릴 틈 없이 차례로 등장하는 계절. 밉기만 한 여름에도 사랑스러운 점이 기어코 하나는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위안이 된다. 
        뜨거워진 입속에 체리를 넣고 깨물자 새콤한 단맛이 입안에서 퍼졌다. 문득 그게 작은 축복처럼 느껴졌다. 잠시나마 모든 게 괜찮아질 거란 기분, 그리고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지 않나 싶은 안도와 함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될 대로 되라지.’ 하면서 다 놓고 싶었던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체리를 하나씩 삼킬 때마다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그래도 역시 잘하게 해주세요.’ 하고. 들쑥날쑥 어수선한 마음으로 7월의 초입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