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기운이 없다. 새해인데, 새해가 됐는데 하고 되뇌면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저 추위를 피해 침대에 웅크린 채 시간을 뭉갤 뿐이었다. 어떤 날은 몸이 거대한 콘크리트로 변한 것 같았고, 또 어떤 날은 질퍽하게 흘러내리는 진흙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이불 밖을 벗어나는 게 하루의 가장 큰 일처럼 느껴지는 아침이 많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해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연말에 흔히 느끼던 우울감도 없었다. 미래를 낙관하는 건 오랜만의 일이라 스스로가 제법 기특하기까지 했는데, 도대체 이 피로감은 뭘까. 계속되는 추위 때문에? 그런데 여름도 싫고 겨울도 싫으면 어쩌나. 이제 두 계절만 남아버렸는데. 그 항생제가 문제였나? 아니면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탓일까? 아니다. 십이월 내내 쏟아진 뉴스들. 그 뉴스들 때문일지도 몰랐다.
       뉴스라는 게 원래 아름다움이랑 거리가 멀다지만, 지난달에는 유독 혹독하기만 했다. 이미 움츠러든 몸을 더 얼어붙게 만드는 소식들이 매서운 바람을 타고 연달아 도착했다. 떫기만 한 감을 와작와작 씹는 얼굴로, 볕을 잃어 메말라 버린 나무의 표정으로 화면 속 세계를 응시했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설명하는 이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화면의 잔상들을 곱씹었고 그러다 보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슬픔과 절망이, 분노와 체념이 차례로 밀려왔다. 그 외의 다른 감정은 잘못된 것 같아서 마음이 들뜰 때면 ‘나라가 이 모양인데’ 혹은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기쁨을 느낀다고 해서 나를 탓하는 사람은 없겠지만(정말?) 어딘가에서는 괴로움과 슬픔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누리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던 일상을 한순간에 빼앗긴 기분이었다. 누구로부터인지도 모를 사과를 받고 싶었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나 모호한 상실감을 설명할 재주가 내게 없다는 것이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거나 분리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여느 때보다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너무 약하고 게으르기에, 몸 바깥의 일들은 죄다 귀찮고 벅차서 투쟁도 연대도 없이 조용하게 한 해를 마무리했다.



자꾸만 잠이 왔다. 마치 오래 미뤄둔 약속인 것처럼. 앉아만 있어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이 감겼고 내려앉는 눈꺼풀에 저항할 새도 없이 까무룩 잠에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매가리가 없을 수 있다니. 조금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몇 년 전에 펴낸 책이 온통 검은 얼룩으로 뒤덮이거나 핸드폰의 자판이 터무니없이 좁게 바뀌는 바람에 쓰고 싶은 문장을 계속 틀리는, 악몽이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꿈들을 꾸다가 깨곤 했다.

차라리 바쁘면 좋았을걸. 연초는 늘 그렇듯 한가했고 사실 그건 프리랜서의 생리라고 봐도 무방했지만, 그 빈틈을 기어코 불안으로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귀한 걸 허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얇게 비집혀 들어가 자랐다. 삶은 아직도 버거운 숙제 같고, 나쁜 점수를 받을까봐 무서운 나는 그 앞에서 또 발을 동동 구르고 절절맸다. 하지만 아무리 다그쳐봐도 마음만 분주할 뿐 의욕은 도무지 솟아날 기미가 없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책을 주워 몇 페이지 읽고,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것 정도가 유일한 활동이었다. 그거라도 하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그렇게 어정쩡한 하루가 지나가면, “고작 이게 다야?” 하며 굳이 핀잔을 줬다.  나를 못살게 구는 건 여전히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글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일지 몰랐다. 바라던 시간이 왔다는 확신이 불쑥 들 때면 뭔갈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땐 스스로를 타일러 어떻게든 책상 앞에 앉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료한 날들 속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깊이를 갖지 못한 채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쓸 수 있는 말은 없는데 쓰고 싶은 마음만 끈질기게 남아 있다는 게 웃기기만 했다. 기다리는 독자도, 청탁하는 편집자도 없는 마당에. 혁명가가 되지도, 온기를 나눌 줄도 모르는 주제에. 내 글의 쓸모를 따져 묻다가 자조의 단계로 진입하면 쓰기를 멈추고 읽던 책을 펼쳐 타인의 문장 속으로, 다시 이불 속으로 돌아갔다.
       좋은 글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일까. 읽다 보면 쓰게 된다고들 하지만 누군가를 번쩍 일으키는 글은, 단단하게 붙잡을 기둥이 되고 넓은 둘레를 갖는 글은 어디에서 태어나나. 애초에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쓰지 못하고 있다면, 슬프지만 나는 후자가 아닐까. 그런 의심만 짙어졌다.



방 안이 어두워 창문을 열어 보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펄펄, 잿빛 하늘을 성글게 매우면서.
        눈이 내릴 때면 이상하게 온 세상이 눈의 속도에 맞춰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겨울의 시간은 가끔 멈춘 것처럼 느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빠르게 지나가기도 했다. 그 낯선 감각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창밖을 한참 바라봤다. 갑자기 마주한 조용한 세상 덕분인지 소란하던 마음이 점차 잦아들어 갔다. 잠시 숨을 고를 때라고, 기다려야 한다고, 공중에서 나풀대는 눈송이들이 꼭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눈에 담기는 풍경이 너무 환해서, 너무 고요해서 그만 유순해졌다. 예쁜 걸 볼 때면 사람은 쉽게 순해지는구나. 저 작고 가벼운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끝내 자기만의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너울댔다. 모든 존재가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 쓸모를 다 한다는 말을, 좀처럼 마음에 닿지 않던 그 말을 아주 잠깐이라도 믿어보고 싶어졌다.

군말 없이 기분에 항복하고 얌전히 이불 속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보잘것없는 시간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조바심을, 저 멀리 어둠까지 힘껏 내달리고 싶은 충동을 잠재운다. 불안의 옆에 나란히 누워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아는 것, 그건 내가 나로 오래 살면서 조금은 잘하게 된 일이다. 어김없이 오고야 마는 공백의 시간을 환대할 재량은 아직 없고, 그 자리를 성큼 넘어가고 싶어 재촉하는 버릇도 여전하지만, 예전만큼 이런 순간들이 자주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무래도 인생의 어느 구간은 다소 망가진 채로 놔두어야 하는 법칙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움직이려 하면 벌칙처럼 더 끔찍한 기분이 몰려오곤 하니까. 그러니 별수 없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결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내일이 되면 미뤄둔 작업을 시작하고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고 밥 대신 과자를 먹는 짓도 더는 그만하고 몇 달 내내 핑계를 대며 하지 않던 운동을 하겠다는 마음 같은 건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내 쓰지 못했던 흰 페이지에는 ‘부동도 하나의 존재 방식’이라는 문장을 적어두었다. 말하자면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도피와 망함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변명. 그렇지만 곧 따뜻한 바람이 훅 불 테니까. 초록의 냄새가 코끝에 스칠 테니까. 그러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테니까. 그때까진 게으름과 눈이 마주쳐도 모르는 척하는 걸로. 원래 오래된 사이일수록 슬쩍 덮어두고 지나가야 하는 것들이 생기는 법이다.
       겨울이 가기를, 얼어붙은 몸이 녹기를. 작은 불씨가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